수원(白)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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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 |
백우경(白宇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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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유래 |
시조 백우경(白宇經 - 시호는 문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황제 헌원의 16세손인 을병의 후손이다. 그는 780년(신라 선덕왕1년) 우리나라에 와서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신라때에 좌복사공대사도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경명왕(신라 54대)때에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하며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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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유래 |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은 '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진나라 때 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명(改名)하고 영월당이 판에 어필(御筆)로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경덕왕(景德王:신라 제54대 왕, 재위기간: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元)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 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시조의 묘소]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있으며 향사는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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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명 |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 인주(仁州)·수주(水州)를 거쳐 1301년(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개칭되었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한 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水原市)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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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소개 |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로 중국 풍익에서 계출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은[백씨대동보]에 황제의16세손 백을병(白乙丙)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에서 출생하여 당나라때 이부상서에 이르렀으나 간신들의 모함을 받자 780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월성군 안강읍 옥산동)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곳에다 영월당과 만세암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가 불분명하여 경덕왕때 중랑장을 지내고 상장군에 증직된 창직(昌稷)을중시조로 받들어 기일세하며, 창직의 증손 휘(揮)가 고려 목종때 수원군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은 원나라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우승상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때 수성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을 관향으로 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은 수원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 [갑자대동보] 발간 당시 각파의 대표들이 회합하여 관향을 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백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 인주공파, 오산군파 등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揮)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육조에 걸쳐 주요관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을 지어낸 맏아들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로 낙향하였으며, 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시랑을 역임했고, 막내 가미(可美)는 판삼사를 거쳐 태자 사부에 올랐다. 한편 대장군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의아들 후재(厚載)가 도통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를 역임하는 등 대를이어 벼슬을 지내 한때 후손들이 가림 백씨(嘉林白氏)로 칭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조에서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문간공 문절(文節)의 아들 이정을 들 수 있다. 그는 연경(燕京)에 가서 10년간 머므르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의 꽃을 피웠으며, 익재 이제현으로 하여금 그의 학맥을 잇게 하여 조선 유학(儒學)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 중기 중종과 선조 양대에 걸쳐 명신으로 이름났던 인걸(仁傑)은 돌도 지나기전에 아버지 익견(益堅)을 잃고 편모가 셋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 어머니가 자는것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늘 불을 켜놓고 자는체 함으로써 그를 먼저 자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예조좌랑과 남평 현감을 거쳐 호조정랑을 지내며 대윤(大尹)과 소윤(少尹) 등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기개높은 인품으로 풍파 많은 일생을 살았다. 1578년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비강화를 주장했으며, 선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어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정국공신로 정해군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손 민수(民秀)는 경서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수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으로 유명했다. 한편 세인(世仁)의 아들 광홍(光弘)이 명종조에 평안도 평사를 사직하고 돌아올때 우리말로 쓴가사 [관서별곡]으로 유명하며, 그의아우 광훈(光勳)은 시서(詩書)에 현달하여 고죽 최경창, 고곡 이달과 함께 [삼당]으로 일컬어졌다. 한말에 와서는 낙관(樂寬), 홍인(弘寅), 성기(性基) 등이 유명했으며, 남규(南圭)는 한일합방이 되자 노백린, 안중근 등 23명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고, 조선혁명군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은 3·1운동때 정주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일규(一圭)는 대동보국회를 창립하고 [국민보]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한국의 권익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 외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 소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대한독립단을 조직했던 삼규(三圭)와 항일투쟁에 몸바쳤던 영촌(永村), 일진(日鎭), 남준(南俊), 광운(狂雲), 남채(南埰), 관수(寬洙), 인해(仁海) 등과 함께 명문의 수원백씨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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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파 |
수원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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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구 |
295,640명이 있다.(19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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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성 촌 |
경기도 이천군 웅탄면 회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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